鄭  澤(정  택) (고려말기-조선초기)

자와 호는 전하여지지 않고 있으며 어사공(御史公)이라 부른다. 고려 공민왕 때 상주판관으로 재임하여 당시 상주(尙州)의 대 세력 가문인 상산군 김득제(商山君 金得齊; 호종1등 공신, 兄 金得培=정당문학, 父 商城君 祿, 祖 上洛君 鎰)와 사돈이 되었다. 상산지에 따르면 아들 의생(義生)을 상산김씨에 결혼시켜 상주에 살게 하였고 그 후 감찰어사대부(監察御史大夫)가 되었다.

 

鄭義生(정의생) (고려말기-조선초기)

어사공(澤)의 아들, 자와 호는 전하여지지 않고 있으며 관직은 판사(判使)라고 상산지(商山誌)에 전한다. 고려 공민왕때 아버지 어사공이 상주판관 재임시 고려말기 대 세력을 형성하였던 상산군(商山君) 김득제(金得齊;호종1등공신)의 딸과 결혼하여 상주(공성면 상초전)에 머물어 살게 됨으로써 어사공파가 상주에 살기 시작한 연유가 되었다.

 

鄭大鈞(정대균) (1514-1567)

어사공(澤)의 7대손으로 상주출신이며 계함(繼咸)의 아들이다. 자는 중보(重甫) 호는 송오(松塢)이다. 1549년(명종 4)에 己酉小科에 합격, 진사가 되었다. 인품이 특히 참되며 깨끗하고 근검하였고 학문에 몰두하여 행동이 신중하였으므로 유림에서 그를 추앙하였고 후에 세덕사(世德祠)에 배향되었다.

 

鄭國鈞(정국균) (1526-1592)

어사공(澤)의 7대손으로 상주출신이며 계함(繼咸)의 아들, 대균(大鈞)의 동생이다. 자는 숙거(叔擧) 호는 복재(復齋)이며 1558년(명종13) 무오소과에 합격, 진사가 되었다. 상주목사 윤국형의 천거로 연은전참봉(延恩殿參奉)이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행동이 장중하고 언행에 무게가 있었으며 학문하는 태도가 한결같았다. 향인들이 추앙하여 그를 따랐으며 송사(訟事)에 공정하게 자문하여 위엄이 있었고 제자의 양성에 힘써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창석 이준(蒼石 李埈)과 같은 문신 학자를 배출하였다. 67세의 고령에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병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 공로로 종6품 사첨시(司瞻寺) 주부(主簿)가 증직되었고 지강서원(芝岡書院)에 배향되었다.

 

鄭而弘(정이홍) (1538-1620)

어사공(澤)의 8대손으로 상주출신이며 은성(銀成)의 아들, 국성(國成)의 조카이다. 처음 이름은 여홍(汝弘)이고 자는 언의(彦毅) 호는 주일재(主一齋)이다. 1582년(선조15) 임오 소과에 합격 진사가 되었는데 학행으로 직장(直長;종7품)을 제수 받고 유곡도 찰방(幽谷道 察訪)을 거쳐 지평(持平;정오품)에 이르렀다. 천성이 순수하고 참되며 학문이 깊고 언행이 올바른 점이 남달랐다. 충효겸전하여 부모상에는 3년 여묘(廬墓)하였으며 임진왜란에는 의병의거로 황령전투에 참여하였고 동산사(東山祠)에 배향되었다.

 

鄭經世(정경세) (1563-1633)

어사공(澤)의 9대손으로 상주출신이며 여관(汝寬)의 아들이다.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시호는 문장공(文莊公)이며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에 진사가 되고 1586년(선조 19)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로 등용된 후 검열, 봉교를 거처 사가독서를 했다. 부친 상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병으로 공을 세웠으나 전란으로 모친과 동생을 잃었다. 부모상례가 끝난 후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수찬(修撰), 정언(正言), 교리, 이조정랑, 사간에 이어 1598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대구부사를 지냈다. 그 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가서 화약의 수입에 공을 세웠으며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나주목사 전라도관찰사 강릉부사를 거쳤다.

 

광해군 때 정인홍의 오현배향철폐 안에 반대하여 삭직되었다가 인조반정후 부제학, 대사헌, 도승지, 의정부 참찬,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1630년 지춘추관사로서 실록청에서 광해군일기 편찬을 담당했다. 성리학에 밝은 학자인 동시에 특히 예학에 밝아 사계 김장생과 교분을 가졌으며 기호계열의 송준길을 사위로 맞아 퇴계학파와 율곡학파가 두 선생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교류하는데 공헌하였다.

 

인조반정 후 서인(西人)이 집권하던 시기에 관직에 오래 임할 수 있었던 것은 선조조 인조조를 통하여 경연에서의 그의 역할이 매우 컸던 이유와 그의 인품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와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과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의 3인 사이의 신의와 교분은 매우 대단하였던 것으로, 이항복이 귀양지에서 “나에게는 두 벗 한음과 우복이 있다”고 자랑한 바 있으며 한음 이덕형의 행장(行狀)을 우복이 지음으로써 확인되고 있다.

 

행장(行狀)은 동춘 송준길(同春 宋俊吉)이 짓고, 시장(諡狀)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지었다. 묘지명(墓地銘)은 창석 이준(蒼石 李埈),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용주 조경(龍洲 趙絅), 묘표(墓表)는 하곡 권유(霞谷 權愈)의 찬이다.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상주의 도남서원, 대구의 연경서원, 경산의 고산서원, 강릉의 퇴곡서원, 개령의 덕림서원, 상주의 우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산소의 소재지는 상주시 공검면 공검지(속칭 공갈못) 근처이며 신도비가 있고 출생지인 상주시 청리면 율리와 별세지인 상주시 사벌면 매호리에 각각 유허비가 있다. 저서로는 양정편(養正篇), 주문작해(朱文酌海), 우복집(愚伏集)이 전하는데 1977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해제를 붙여 《우복집》을 영인 발행하였고 2004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6권으로 국역하여 《우복전집》을 발행한 바 있다.

 

鄭而龍(정이룡) (1572-1605)

어사공(澤)의 8대손으로 상주출신이며 주부 국성(國成)의 아들이다. 자는 견경(見卿) 선조조에 소과를 거쳐 진사가 되었고 학행으로 추천되어 전생서(典牲署) 참봉(參奉)이 제수되었고 34세로 일생을 마치자 통훈대부 장악원정(通訓大夫 掌樂院正)이 증직되고 동산사(東山祠)에 입향되었다.

 

 

鄭  櫟(정  력) (1584-1627)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아들이며 자는 대용(大用)이다. 1627년(인조 5) 정묘 식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만호(萬戶)를 거쳐 정2품 정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鄭憲世(정헌세) (1597-1660)

어사공(澤)의 9대손으로 상주출신이며 퉁훈대부 이룡(而龍)의 아들이다. 자는 경식(景式), 호는 죽헌(竹軒)으로 1627년 (인조 5) 정묘소과에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학행으로 선릉 참봉(宣陵 參奉)에 제수되고 빙고 별검(氷庫 別檢; 정8품직)을 지냈는데 지조가 있고 흔들림이 없어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鄭榮世(정영세) ( 미상 )

어사공(澤)의 9대손으로 상주출신이며 통훈대부 이룡(而龍)의 아들이다. 소과를 거쳐 진사가 되었다.

 

鄭日知(정일지) ( 미상 )

어사공(澤)의 10대손으로 상주출신이며 진사 영세(榮世)의 아들이다. 소과를 거쳐 진사가 되었다.

 

鄭  杺(정 심) (1597-1625)

어사공(澤)의 10대손으로 상주출신이며 문장공(經世)의 아들이다. 자는 문중(文中)이고 1624년(인조 2) 봄에 진사가 되고 같은 해 가을 갑자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곧 승사랑(종 8품) 예문관 검열(檢閱;한림)이 되었으나 이듬해 역질로 세상을 떠났다. 사초(史草) 2권을 남겼다.

 

鄭道應(정도응) (1618-1667)

어사공(澤)파의 상주출신이며 문장공(經世)의 손자이고 심(杺)의 아들이다. 자는 봉휘(鳳輝), 호는 무첨(無忝)이다. 1649년(인조 27)에 유일로 천거되어 왕자의 스승인 대군사부(大君師傅;종9품 장사랑)가 되고 시강원 자의(侍講院 諮議)를 역임하였다.  관직은 종5품 봉훈랑 공조좌랑을 거쳐 단성현과 창녕현의 현감을 지냈다. 저서는 《昭代名臣行蹟》《昭代粹言》등이 있다.

 

鄭  橒(정  운) (1628-1670)

어사공(澤)의 10대손으로 상주출신이다. 명세(鳴世)의 아들이며 자는 여화(汝和)이다. 1660년(현종1)에 경자 식년소과에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鄭錫僑(정석교) (1646-1700)

어사공(澤)파 상주출신으로 문장공 경세(經世)의 증손이며 현감 도응(道應)의 아들이다. 자는 희백(希伯) 호는 환성재(喚惺齋)이다. 학행으로 숭릉참봉(崇陵參奉)에 제수된 후 신령(新寧) 및 영양(英陽)의 현감을 지냈다.

 

鄭道三(정도삼) (1646-1700)

어사공(澤)의 11대손으로 상주출신이며 진사 운(橒)의 아들이다. 자는 덕원(德元).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내고 웅천현감을 지냈다.

 

鄭冑源(정주원) (1686-1756)

어사공(澤)파 상주출신으로 문장공(經世)의 현손이며 현감 석교(錫僑)의 아들이다. 자는 원보(元甫) 호는 엽동(燁洞)이며 1729년(영조5)에 장릉참봉(章陵參奉)이 되었는데 학문에 힘써 문한에 밝았다. 만년에 율리에서 우산으로 이거하였다.

 

鄭智模(정지모) (1716-1776)

어사공(澤)파 상주출신으로 문장공(經世)의 5대손이며 주원(冑源)의 아들이다. 자는 계정(季貞) 호는 추간(秋澗)이고 1762년(영조 38)에 임오소과에 합격 진사가 되고 1770년(영조 46)에 경기전참봉을 거쳐 음성(陰城) 현감을 지냈다. 청렴하고 근면하였으며 유고 3책을 남기고 있다.

 

鄭衡臣(정형신) (1725-1803)

어사공(澤)파 상주출신이며 헌세(憲世)의 현손, 석보(錫輔)의 아들이다. 일명 윤원(潤源)이며 자는 덕언(德彦)이다. 1771년(영조 47) 신묘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은 은계찰방(銀溪察訪) 상운찰방(祥雲察訪) 예조좌랑을 거쳐 당상관 오위장을 지냈다.

 

鄭允中(정윤중) (1735-1787)

어사공(澤)의 14대손으로 상주출신이며 홍원(弘源)의 아들, 생부는 삼일(參一)이다. 처음 이름은 윤모(允模)이고 자는 회천(賄天)이다. 1784년(정조8) 갑진문과(甲辰文科) 정시(庭試)에서 병과로 급제, 관직은 성균관 전적을 거쳐 품계는 종4품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이르렀고 효행이 극진하여 영호남에서 유장(儒狀)이 있었다.

 

鄭宗魯(정종로) (1738-1816)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6대손으로 어사공의 15대 종손이며 인모(仁模)의 아들이다. 자는 사앙(士仰), 호는 입재(立齋)이며 학행으로 천거되어 52세 때 처음 광릉 참봉(光陵 參奉)에 제수되고, 59세 때인 정조 20년에 사헌부 지평․장령에 이어 이듬해 함창현감에 제수되었다. 성리학에 정통하였고 도학문장이 당대 제일 뛰어나다는 세평이 있는 가운데 후진양성에 힘을 쏟아 당대의 유종(儒宗)으로 추앙되면서 영남은 물론이요 호남이나 관동 서북지방에서도 선비들이 모여들었고 후에 유림에서 상주 종택에 별묘를 지어 불천위(不遷位) 봉향하고 있다. 관품은 통훈대부에 그쳤으나 태극권자설(太極圈字說)․태극동정설(太極動靜說)․오상설(五常說)․이발기발설(理發氣發說)․맹자론(孟子論) 등 많은 학설을 내어 입재문집의 분량이 4,500여 면에 달하는데 1990년 여강출판사에서 영인 출판하였다.

 

鄭象晋(정상진) (1770-1848)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7대손으로 어사공파 16대 종손이며 종로(宗魯;立齋선생)의 아들이다. 자는 일진(日晋) 호는 석파(石坡) 또는 어초재(漁樵齋)이다. 학행으로 선릉(宣陵) 참봉에 제수되었고 우복집(愚伏集)과 입재집(立齋集)을 간행하였다. 저서로는 어초재집(漁樵齋集) 2책이 있다.

 

鄭象履(정상리) (1774-1848)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7대손이며 익로(翼魯)의 아들이다. 자는 중소(仲素) 호는 제암(制庵)이다. 입재(宗魯)의 제자이며 경학에 밝았다. 저서로 시문집 4책이 간행되어있다.

 

鄭象觀(정상관) (1776-1820)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7대손이며 성로(成魯)의 아들, 생부는 종로(宗魯;立齋선생)이다. 자는 숙옹(叔顒) 호는 곡구(谷口). 문장이 뛰어나고 박학하였고 저서로 곡구원기(谷口園記) 4책이 간행되었다.

 

鄭民秀(정민수) (1786-1843)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8대손으로 어사공파 17대 종손이며 참봉 상진(象晋)의 아들이다. 자는 억일(億一)이며 학행으로 혜릉(惠陵) 참봉에 제수되고 천품이 바르고 겸손하여 언행이 규칙을 벗어남이 없었다.

 

鄭象樞(정상추) (1788-1867)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7대손으로 병로(秉魯)의 아들, 생부는 형로(衡魯)이며 자는 치공(穉拱)이다. 1822년(순조 22) 임오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통정대부 병조참의, 예조참의에 이르렀다.

 

鄭民秉(정민병) (1800-1882)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8대손이며 상관(象觀)의 아들, 생부는 상진(象晋)이다. 자는 문호(文好) 호는 기주(箕疇)이고 학행으로 처음 감역(監役)을 제수 받고 관직에 올라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에 이르렀고 문집을 남겼다.

 

鄭允愚(정윤우) (1804-1869)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9대손으로 어사공파의 18대 종손이며 참봉 민수(民秀)의 아들이다. 자는 유선(幼善 호는 백인당(百忍堂)이다. 도학으로 추천되어 희릉(禧陵) 참봉이 되고 이후 관직이 통훈대부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으며 병인양요(丙寅洋擾)에 영남우도소모사(嶺南右道召募使)가 되었다. 천성이 어질고 후덕하여 부처가 살아났다는 세평이 있었다.

 

鄭若愚(정약우) (1814-1856)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9대손이며 민목(民穆)의 아들이다. 자는 성지(省之)이고 1848년(헌종 14)에 성균관시에서 진사가 되었다.

 

鄭東奎(정동규) (1824-1854)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10대손으로 어사공파의 19대 종손이며 통훈대부 윤우(允愚)의 아들이다. 자는 명서(明瑞)이며 1848년(헌종 14) 증광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기주관(記注官) 수찬관을 지내고 관직이 통훈대부 홍문관 부교리에 이르러 주위의 촉망을 받았으나 요절하였다.

 

鄭東箕(정동기) (1825-1905)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10대손으로 통훈대부 윤우(允愚)의 아들이다. 자는 창칠(蒼七) 호는 남서(藍墅)와 차남(此南)이다. 1865년(고종 2) 을축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882년(고종 19)에 재릉(齋陵)참봉에 제수되었다. 1888년(고종 25)에 문경현감을 비롯하여 5개군의 목민관을 거쳐서 종2품 가선대부에 올랐고, 밀양도호부사 겸 대구진관첨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유고 3권이 있다.

 

鄭喆愚(정철우) (1841-1925)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9대손이며 민영(民英)의 아들이다. 자는 명원(明遠) 호는 병암(甁庵)이며 1891년(고종 28) 증광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인품이 덕성스럽고 너그럽고 정중한 언행으로 주위의 모범이 되었으며 병천정에 문집이 남아있다.

 

鄭宜黙(정의묵) (1847-1906)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11대손으로 어사공파의 20대 종손이며 통훈대부 동규(東奎)의 아들이다. 1856년(고종 6)에 진사가 되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릉(思陵) 참봉을 거쳐 금부도사가 되었다. 1885년(고종 22) 증광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은 홍문관 교리, 승정원 동부승지를 역임하였고 통정대부 안동대도호부사에 이르렀다. 1895년에는 동학란에 영남우도 소모사(嶺南右道召募使)에 제수되었고 일생을 청렴하게 보냈다.

 

鄭佑黙(정우묵) (1849-1911)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11대손이며 가선대부 동기(東箕)의 아들이다. 초휘는 돈묵(敦黙)이며 자는 천필(天必)이다. 1882년(고종 19) 임오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홍문관 교리,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종2품 가의대부(嘉義大夫) 궁내부특진관에 이르렀고 선산도호부사와 진주목사를 지냈다.

 

鄭容黙(정용묵) (1850-1917)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11대손이며 통훈대부 동규(東奎)의 아들이다. 자는 구여(九如)이며 1885년(고종 22) 을유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904년 효릉(孝陵) 참봉에 제수되었다.

 

鄭夏黙(정하묵) (1850-1908)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11대손이며 동석(東奭)의 아들이다. 초휘는 寅黙, 자는 성진(誠進), 호는 심암(審庵)이다. 1885년(고종 22) 을유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888년 학행으로 추천되어 금부도사가 되었다가 1892년 임진별시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관직은 홍문관 응교를 거쳐 영천군수 순흥 현감을 지내고 비서승(秘書丞)에 올라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진종문헌록(晋宗文獻錄) 2권, 선례류집(先禮類集) 2권 등 유고집을 남겼다.

 

鄭厚黙(정후묵) (1852-1896)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11대손이며 동석(東奭)의 아들이다. 자는 성원(誠遠) 호는 애려(愛廬)이다. 1888년(고종 25)에 성균관시에 합격 진사가 되었다.

 

鄭佐黙(정좌묵) (1854-1915)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11대손이며 가선대부 동기(東箕)의 아들, 우묵(佑黙)의 아우이다. 자는 낙중(樂仲)이고 1885년(고종 22) 을유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鄭守黙(정수묵) (1854-1904)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11대손이며 동익(東翼)의 아들이다. 자는 위유(衛臾)이고 호는 당산(唐山)이다. 1894년(고종 31)에 소과를 거쳐 진사가 되었다.

 

鄭東旭(정동욱) (1858-1890)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10대손이며 소우(蘇愚)의 아들이다. 자는 승백(昇伯)이다. 1885년(고종 22) 을유식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정3품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 겸 오위장을 지냈다.

 

鄭萬愚(정만우) (1859-1901)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윤중(允中)의 현손, 민섭(民燮)의 아들이며 생부는 민태(民泰)이다. 자는 국현(國賢)이고 1891년(고종 28)에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鄭弘黙(정홍묵) (1860-1934)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11대손이며 동필(東弼)의 아들이다. 자는 의경(毅卿) 호는 수헌(修軒)이다. 1891년(고종 28) 신묘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鄭東斗(정동두) (1874-1903)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10대손이며 진사 철우(喆愚)의 아들이다. 자는 춘경(春卿)이며  1894년(고종 31) 성균관시에서 진사가 되었다.

 

鄭在悳(정재덕) (1867-1911)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12대손으로 참봉 용묵(容黙)의 아들이며 자는 성기(聖基)이다. 1901년(광무 5)에 태릉참봉(泰陵參奉)에 제수되고 관직은 시강원 시종관에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교남교육회에 가입하여 구한말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였고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 발기인이기도 하다.

 

鄭在龍(정재룡) (1879-1935)

어사공(澤)파 상주출신. 문장공(經世)의 12대손으로 동부승지 우묵(佑黙)의 아들이다. 1903년(광무 7)에 정6품 승훈랑(承訓郞) 경기전(慶基殿) 참봉에 제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