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晋州)는 경상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거열성인데 신라 문무왕때 거열주라 하였고, 757년 강주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로 개칭되었다.

 

995년(성종 14)에 진주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에와서는 진양도호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가 되었다. 별호로 진양 등으로 불리웠다.  

 

예로부터 <진주8정(晋州八鄭)>으로 불리워졌던 진주정씨(晋州鄭氏)는 동성동본이면서도 세계를 달리하는 여러 계통으로 갈라져서 계대를 이어왔다. [조선씨족통보]를 비롯한 제문헌(諸文獻)에 진주정씨는 12파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소목은 밝힐 수 없고 현존하는 계파 중에서 비교적 널리 알려진 다음 5파로 대별해서 상고한다.

 

첫째 고려통합삼한벽상공신으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영절공 정예(鄭 藝)의 계통은, 그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문익공 정시양(鄭時陽)을 일세조로 받들고 있으며, 시양의 7세손 수(需)가 판도좌랑과 좌사간을 역임하고 진양부원군에 봉해져서 가세를 일으켰고,  그의 후손 을보(乙輔)는 정당문학과 도감제조를 지내고 청천군에 봉해졌으며, 공민왕때 찬성사에 올랐다.

 

한편 숭정대부로 찬성사를 역임했던 신중(臣重)의 아들 이오(以吾)는 조선 태종때의 명신으로 찬성과 대제학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분]은 세종과 문종조에 걸쳐 조정의 중신으로 많은 치적을 남겼고,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나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의 반대파로 몰려 사사(賜死)되었다.

 

[일월록(日月錄)]에 의하면 그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음모가 무르익을때 제찰사로서 영남을 순회하고 충주에 이르자 김종서와 황보인이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을 잡아 죽이려 관원을 보낼 것이라고 믿고 용안역을 지나가는데 관원이 달려오며 전지(傳旨)가 있다고 외쳤다.

 

분은 말에서 내려 재배하며 말하기를 "노상에서 형을 받는 것은 상스럽지 못하니 역관으로 갈 수 없느냐"고 하자, 관원이 말하기를  "나는 다만 명을 받아서, 공을 압송하는 것이요" 하였다.

 

십여 일이 걸려 유배지인 낙안에 내려가, 항상 조상의 신주를 받들어 제사를 지냈는데  하루 저녁은 자다가 일어나서 함께 있던 중 탄선(坦禪)에게 "네가 밥 한그릇을 정하게 지어라. 내가 우리 조상에게 제사지내겠다" 하고 제사를 지낸 뒤에 신주를 모두 불에 태웠는데 조금 후에 관원이 와서 사사(賜死) 하였다고 한다.

 

[장빈호찬(長貧胡撰)] 에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관원이 형을 집행하려고 왔을 때 분은 목욕을 하고 관대를 갖추어 조상의 신주에 재배하고 신주를 태운후 관대를 벗고 우장 옷을 입고 수건을 쓰고 그의 아내에게 영결(永訣)하니 아내가 붙들고 통곡을 하자 그는 달래며 "조정의 명령이니 항거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에 일은 그대가 다스리라."하고는 죽음에 임하여 감형관이 형을 집행하려고 목을 얽을 때 "죽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명분이 다르다. 내가 만일 두 마음이 있다면 죽은 뒤에 맑은 하늘이 그대로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이상이 있을 것이다" 하고 형을 받아 죽으니, 홀연히 구름이 모여 들고 비가 쏟아져서 감형관이 우산을 받고 성안에 들어왔다고 한다.

 

둘째, 고려조 호장(戶長)을 지낸 정자우(鄭子友)의 후손에서는 그의 6세손 신열(臣烈)이 고려 현종때 유일로 천거되어 여러 청환직을 거친 후 병부상서에 올라 거란의 침입을 격퇴시킨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올라 진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선주지사 임덕(任德)의 아들 유(愈)는 아우 손(孫)과 함께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부사가 되었던 천익(千益)은 당시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서 향리로 돌다가 퇴헌정(退軒亭)을 짓고 자적하다가 사위인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왔으므로 이를 시배(始培)하여 <물레>와 <씨아>를 창안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셋째, 통정대부로 첨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던 장(莊)을 파조로 하는 계통에서는 세종조의 명신인 척(陟)이 뛰어났다. 척(陟)은 교서관 정자를 거쳐 봉상시 주부와 감찰을 지내고 판한성부사. 수문전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1463년(세조 9) 양성지와 함께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했다.

 

척의 아들 성근은 천성이 굳세고 곧아서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소문쇄록]에 의하면 그가 성종때 대마도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일이다. 도주(島主)의 집앞에 이르면 도주가 문밖에 나와서 조선의 왕명을 받게끔 되어 있었는데도 도주가 문밖에 나오기를 꺼려하였다, 이에 성근은 밖에서 호상에 걸터 앉아 통역을 시켜 두번 세번 독촉하여 왕명을 의식대로 공경히 받게 하였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했던 성근은 연산군의 단상법(短喪法)을 어기고 친상에 3년상을 치렀고 또 성종이 승하 하였을 때에도 3년상을 행하니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려 갑사사화 때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들로 승문원 박사로 있던 주신(舟臣)이 아버지의 죽음을 슬피하여 음식을 입에 대지 않다가 굶어 죽었으며, 주신의 아우 매신(梅臣)과 매신의 아들 원린(元麟). 원기(元麒)와  원린의 아들 효성(孝成)이 모두 효행이 뛰어나 4대 (四代) 6명(六名)의 정문( 門)이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되자 80노모를 등에 업고 전남 광양군 골약면 마동리로 피난했다가  중동리에 정착했던 대유(大有)는 효성이 지극하여 도관찰사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5형제의 후손들이 현재 광양지방에 집중세거하면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다.

 

넷째, 문하시중평장사로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던 정헌(鄭 櫶)의 계통에서는 그의 손자 온(溫)이 청맹(靑盲)으로 유명했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대사간을 역임했던 온(溫)은 눈뜬 장님을 가장하고 지리산 청학동에 숨어 살았는데, 조선이 개국된 후 태조가 수차례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매서운 절개를 지켰다.

 

태종이 사람을 보내서 칼로 눈을 찌르는 흉내를 내어 보았으나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온의 아우로 고려 말에 감찰어사를 지낸 택(澤)의 10세손 경세(經世)는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여 주자학의 거두로서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내며 성리학자인 사계 김장생과 함께 우리나라 예학(禮學)의 금자탑을 세웠다.

 

다섯째, 고려 때 첨정(僉正)을 지낸 정중공(鄭仲恭)을 파조로 하는 계통에서는 그의 15세손 기룡(起龍)이 초명(初名)인 무수(茂壽)를 선조의 명(命)을 받아 기룡(起龍)으로 개명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에 올랐던 기룡은 거창과 금산 싸움에서 무공을 세웠고, 곤양수성장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방어했으며 상주 판관으로 상주성을 탈환한 후 이어 성주, 합천, 초계, 의령, 고령 등지의 여러 성(城)을 탈환하는데 무명을 떨쳤으나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통영 진중에서 일생을 마쳤다.

 

  -충장공파(忠莊公派) : 고려의 건국공신으로 문하 시중평장사를 지낸 정예(鄭藝) 를 시조로 한다.

  -은열공파(殷烈公派) : 호장을 지낸 정자우(鄭子友)를 시조로 한다.

  -공대공파(恭戴公派) : 고려 말 통정첨지중추원사(通政僉知中樞院事) 를 지낸 정장(鄭莊)을 시조로 한다.

  -첨정공파(僉政公派) : 고려 때 검정을 지낸 정중공(鄭仲恭)을 시조로 한다.

  -우곡공파(愚谷公派) : 고려 때 대사헌을 지낸 정온(鄭溫)을 시조로 한다. 정헌(鄭櫶) 계통

  -어사공파(御史公派) : 고려 때 감찰어사를 지낸 정택(鄭澤)을 시조로 한다. 정헌(鄭櫶) 계통

  -지후공파(祗侯公派) : 고려 때 지후를 지낸 정신(鄭侁)을 시조로 한다.

  -내부사공파(內府事公派) : 고려 때 판내부사를 지낸 정안교(鄭安校)를 시조로 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양·진주정씨(晋陽·晋州鄭氏)는 남한에 총 55,464가구, 231,28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원도 홍천군 서면 길곡리

 경남 진양군 사봉면 사곡리

 전남 화순군 북면 서유리

 경남 남해군 서면 정포리

 전남 영광군 군서면 덕산리

 경남 진양군 보양면 이천리

 전남 광양군 골약면 중동리

 경남 진양군 사봉면 마성리

 전북 고창군 무장면 덕임리